초 겨울을 지나는 방법

적적(笛寂)22일 전

새벽에 눈을 떴습니다.

아직 어둠이 깨지지 않고 살얼음처럼 남아있는 시간에. 눈을 감은 채로 나에게 오고 있는 시간을 가늠해봅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듣고 모란이 피어납니다. 그리고 제게 와 축축한 코를 대고 다시 저를 밟고 다니다가 엉덩이를 제목에 대고 눕습니다. 눈을 뜨고 몸이 눈을 뜨는 그 잠깐의 시간 동안 모란의 이마를 쓰다듬어주다가 몸을 일으킵니다.


지난 생일에 못 본 친구가 아침을 먹자고 온다고 하였습니다. 분명 갈 곳도 할 일도 없는 친구는 아침부터 멀리서 찾아오는 것일 겁니다. 그냥 멍하니 산책을 잠깐 한 뒤 들어와 아침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9시에 도착한다는 친구들은 8시가 넘어서 근처라며 전화를 했습니다. 가까운 곳으로 가기로 했지만, 일요일 아침 8시에 문을 여는 식당은 좀처럼 나타나 주지를 않았습니다. 우린 서로에게 투덜거리고 낄낄거리며 문을 연 곳을 찾고 있었습니다.


이른 아침 형기를 다 채우고 빛나는 가을에 출소한 늙은 죄수들은 쌀쌀한 바람에 헐렁한 옷을 입고 역 앞의 설렁탕, 집 앞에 차를 멈추고 설렁탕집에 들어섰습니다.

 

문을 연 곳은 그곳뿐이었으므로 그리고 등산복을 입은 수많은 사람 속에 섞여 잠깐 나갈까를 고민하다 게으른 사람 수상자들은 그냥 구석진 자리에 앉아 설렁탕과 수육을 시켜두고 다시 아까 물었던 안부를 되묻고 서로의 핸드폰에 빠져 음식을 기다렸습니다.

작은 항아리에서 생김치와 깍두기를 먹을 만큼 꺼내고 가위로 잘라둡니다.

 

공깃밥이 먼저 나오자 친구는 뚜껑을 열고 밥을 후-우하고 한번 불더니 깍두기 국물을 숟가락으로 떠먹고 밥 한 공기를 깍두기에 먹어버렸습니다. 공깃밥이 다섯 숟가락으로 비어버렸습니다.

 

수육과 설렁탕 국물이 나오자 공깃밥 한 그릇을 추가로 시켜 국물에 말고 이제 칼칼한 맛이 드는 김치를 손으로 찢더니 제 밥 위에 칭칭 감아 먹으라고 눈짓을 합니다. 제가 질색을 해도 괜찮다며 너니까 내가 친히 김치를 찢어주는 거라며 어서 먹으라고 다음 김치를 찢을 준비를 하고 기다립니다.


수육 한 점씩을 소스에 찍어 먹을 때도 그 아침에 그래도 소주를 먹어야겠다며 소주를 시켜 운전하는 친구에게도 술잔을 채우며 받아놓기나 하라고 또 제게도 받기만 하라며 술을 따릅니다.

운전하는 친구의 잔을 먼저 마시고 다시 김치를 찢어서 밥에 올리고 혼자서 술을 따르고 다시 밥 한 숟가락을 떠먹고 엄지손가락을 입으로 빨았다가 다시 제가 뜬 밥에 찢어둔 김치를 올리고 안 먹겠다는 술을 기어코 먹인 뒤 김치 찢던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고 그 손으로 다시 김치를 찢고 더럽다고 김치 찢고 네 입으로 빨고 내 머리 쓰다듬고 도저히 더러워서 못 먹겠다고 해도 다 약이다. 너에게만 허락된 사랑인 거라며 멈출 의사가 없으니 따르라고만 합니다.

 

난 다른 곳에선 이러지 않아 다시 먹으라고 눈을 깜빡거리고 술 한잔 더 따라주고 꺼내놓은 김치와 깍두기를 한 번 더 꺼내 먹고 소주를 한 병 더 시켜 수육을 다 비울 동안 우린 특별한 말도 없이 등산하러 가는 사람, 등산을 다녀온 사람들 틈에서 서로에게 할당된 밥과 국물 그리고 수육 대자까지 다 비워버렸습니다.


저는 아침부터 마신 술로 볼이 발그레해져 있었고 한 친구는 배가 터지겠다고 하고 김치를 찢어주던 친구만 배가 덜 찼다며 커피숍에 가서 조각 케이크라도 먹고 가자고 해서 다시 커피숍에 들렀습니다.


두 친구 모두 어릴 때부터 동네에서 알게 된 친구였습니다. 한 친구는 아내가 죽자 두 딸들이 보고 싶다는 장모님께 보이려고 안산에 오는 친구입니다.

다른 친구는 몇 년 만에 만나는 친구인데 어릴 때 동내에서 제일 잘 살던 집 친구였습니다. 작년 초 사업이 모두 망하고 지금은 시골 장날을 찾아다니며 옷을 팔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셋은 손등이 시린 가을날의 얼굴로 오늘 하루를 보냈습니다.

자꾸만 제가 뭐라고 투덜거리면 눈을 깜빡이고 머리를 쓰다듬던 손등은 마디가 너무 커져서 말릴 수가 없었습니다.


잠깐 화장실을 다녀온다더니 계산을 미리 해버렸습니다. 우리 셋 중에 내가 제일 잘 산다며 웃던 친구가 다시 눈을 깜빡이며 머리를 쓰다듬습니다. 녀석과 차로 돌아가며 팔짱을 끼고 가만히 친구 주머니 속에 지갑에 있던 지폐를 모두 넣었습니다.


일요일 오전은 지나고 해가 뜨고 하늘은 푸르러도 추웠습니다.


저녁이 되어서야 전화가 옵니다.

눈을 깜빡이며 머리를 쓰다듬고 있을 친구의 손바닥이 손가락이 손등이 수화기 너머로 튀어나옵니다.


이제 막 추워지기 시작한 가을의 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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