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주말이다.
늘 고민이 많다. 오늘은 또 무얼 해 먹을까. 이번 주말은 어떤 메뉴가 좋을까. 이왕이면 한 주간의 고생을 달래 줄 수 있는 와인과 잘 어울리는 한 상이었으면 좋겠다. 남편에게 물었다.
"뭐 먹고 싶어?"
지난 날, 라자냐에 도전한 적이 있다.
그날은 평일 저녁이었고, 딱히 특별할 것도 없는 날이었다. 우연히 유튜브를 살피다 발견한 요리 레시피가 내 의지를 불지폈다. 지난 이탈리아에서의 라자냐가 떠올랐고, 곧바로 장을 봐왔다. 퇴근한 남편에게 서프라이즈 식탁을 선보이고 싶었다.
그런데 하필 도전을 번거로운 레시피로 했나 보다. 그간 양식을 많이 만들어 본 터라 이 분야에는 자신있다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많이 복잡했다. 무엇보다 여러 과정이 필요했고 조리시간도 꽤나 소요됐다. 더구나 처음 만들어서인지 잘못될까 노심초사하는 바람에 식은땀이 삐질삐질 나는 것이었다.
맛은 다행히 그럭저럭 괜찮았다. 하지만 이내 긴장이 풀려버렸고, 라자냐는 일 년에 한 번 만들자며 무의식 중에 스스로 다짐하게 된다.
그런데 오늘, 남편이 라자냐를 먹자는 거 였다.
아니 내가 얼마나 힘들게 만들었던 건데, 또 만들어달라고? 순간 울컥했다.
"자기가 만드는 것 아니라고 너무 쉽게 말하는 거 아냐?"
그런데 일순간 그만큼 내 음식이 맛있었나 싶은 생각에 오묘한 감정이 드는 것이었다. 좋아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이 되다가 어느새 핸드폰으로 장을 보는 나를 발견한다.
그래, 이번에는 보다 간편하고 손쉽게 만들어보자.
어쩌다 보니 또 주방에 서 있다. 앞치마를 두르고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나본다.
남편과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여행을 자주 다니는 편이다. 실은 번 돈 다 여행에 투자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이를 낳으면 그 역마살이 운을 다할 줄 알았는데, 웬걸 다하기는 커녕 목돈을 들여서라도 애들까지 끌고라도 가는 우리를 발견하기에 이른다. 어쩌면 여행은 우리 부부의 최대 인생의 낙일지도 모른다.
여행을 하고 오면 한동안 삶의 활기가 느껴지곤 한다. 그렇게 쉼은 우리에게 중요한 부분으로 다가온다. 내려놓고 쉬어야 한다. 그래야 또 다음을 살아갈 수 있다.
여행지에서 만난 음식은 지난 여행지에서의 열정을 상기시켜준다. 어쭙잖게 따라한 음식일지라도, 떠났던 그날의 즐거웠던 추억을 다시금 되새기게 해 준다. 이만한 타임머신이 또 없다. 간이야 맞추면 그만이니까, 최대한 그 맛을 재현하려고 노력해 본다. 그러면 음식을 만드는 동안도, 맛보는 그 순간도 마치 지난 여행지로 회귀하는 듯하다. 그래서 나는 여행에서 돌아오면 여행지에서 맛본 음식을 흉내 내본다.
라자냐는 8년이나 지난 이탈리아 여행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그전에는 기껏해야 토마토 파스타나 크림 파스타만 먹어본 나였기에, 처음 맛본 라자냐는 정말이지 충격적이었다. 중간에 무슨 소스인지는 몰라도 크리미한 질감과 진한 토마토의 여운이 어우러져 대단히 환상적인 맛을 자아냈다. 너무 맛있어서 다음 입이 아까울 지경이었다. 이 멋진 음식을 언젠가 꼭 한번 따라 만들어 먹고 싶었다.
라자냐는 어려웠다.
주부는 9단이라 하던가. 나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새댁이었고, 굳이 표현하자면 이제 막 김치찌개 정도 끓일 줄 아는 주부 1단에 불과하였다. 레시피를 열심히 찾아보았지만, 생각보다 많지 않았고 그나마 찾은 레시피는 너무나 복잡했다. 그리고 금시에 나는 포기했다.
그러다 수 년이 흘렀고, 우연한 기회에 의지를 불태우게 되었다. 그렇게 만든 라자냐의 맛은 꽤나 성공적이었고, 맛보며 떠난 또 하나의 여행은 우리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남편은 그때 그 기억이 사뭇 잊히지 않았나 보다. 다시 한번 먹고 싶어 했다.
그래서 만들었다. 라자냐.
한낮의 더위에 불 앞에 있으니 어찌나 더웠는지 모른다.
그래도 식탁에 완성된 라자냐를 올리자, 이내 불이라도 켠 마냥 식탁 중앙이 환해진다. 몇 시간 전부터 병 브리딩 해 놓은 레드 와인을 콸콸 따른다. 발사믹 식초와 올리브유로 한껏 치장한 샐러드와 식감이 상큼한 그린 올리브를 함께 내 놓는다. 이로써 그럴 듯한 한 상이 차려진다.
8년 전, 이탈리아의 라자냐는 먹을 수 없겠지만.
이렇게 우리는 이탈리아로 여행을 다녀왔다. 요리가 참 그렇다. 코로나로 한동안 다니지 못한 여행을 위로해 주 듯, 요리는 우리 가족에게 비행 없는 소중한 여행의 경험을 선사 해 준다.
여행은 분명히 좋은 쉼이 되어 주겠지만.
엄마는 아팠고, 이제는 떠나지 못한다. 그런 엄마에게 직접 만든 요리로 지난 우리의 여행을 다시금 안겨주고만 싶다.
떠나는 것만이 여행은 아니다.
떠나지 못 해도 너른 하늘, 훨훨 날아 갈 수 있다.
나의 라자냐가 그랬다. 지난 나의 달콤한 신혼의 추억을 또는 엄마와의 마지막 여행을 떠올리게 해 준 최고의 음식. 두 번의 라자냐는 우리 식탁을 환하게 밝혀주었고, 동그란 식탁을 삥 둘러앉아 어느새 추억에 잠겨 나누는 담소만큼이나 소중한 것도 없을 것이다.
주말, 행복한 저녁식사의 순간. 나의 라자냐는 이렇게 완성 되었다.
다음 주말은 또 어떤 음식으로 여행을 떠나볼까.